유학을 준비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왜 수학을 좋아해? 혹은 "왜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어?" 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자소서에도 써야했고, 학교 영어 스피킹 시험을 준비할 때나, 새로운 박사과정생 친구를 사귀게 되었을 때 등등, 왜 수학을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하는지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심오한 철학적 답을 바라고 물어본건 아니니, 뭐 물론 대충 그럴싸한 말로 지어내서 적당히 대답하면 그만인 질문이긴 한데, 나 스스로도 정말 궁금해졌다. 나는 왜 수학을 공부하지? 내 전공은 왜 수학일까. 왜 굳이굳이 수학으로 박사과정까지 하고 있는 걸까.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는 나 자신을 수학자로 정의했고, 수학이 재미있어서 계속하다보니 박사과정까지 하고있다. 어쩌다가? 이 질문의 구체적인 답을 찾기 위해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봤다.
어린시절 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모든 것을 잘했던 것 같다.(우물 안 개구리이긴 하지만.) 엄마아빠가 내 교육에 열정을 쏟으셨고, 나도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8살때부터 영어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시절 시험에서도 곧잘 90점-100점을 맞곤 했다. 그 와중에 내가 칭찬을 받는 건 항상 수학이었던 것 같다.
왜? 나는 여자애니까. 여자애는 수학을 잘 하면 안 되는 건데, 다른 일반 남자애들에 비해 잘하니까 다들 신기했나보다. 칭찬을 받는게 좋았다. 공부를 잘 하는 걸로 주목받는게 좋았다. 특히 귀찮은 남자애들을 이기는게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공부하기를 좋아하기만 했던 것 도 아니다. 몇 살 때 인지 모르겠으나, 눈높이 수학으로 두자리수 +두자리수 를 하던게 생각이 난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게 너무 지루하고 하기 싫어서, 선생님이 오기 전에 책을 숨긴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가 숨겨놓고 똘망한 눈으로 "없어져떠요.." )
어린시절을 상기하다 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가 생각이 난다. 처음으로 구구단을 공부하는데, 무작정 외우려니 외워지지가 않아서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엄마가 차분히 앉혀서, 구구단의 원리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도장 조각들로 갯수를 세어 가면서. 아마 이게 내 첫 수학자적 모멘트 아니었나 싶다. 내 기억속에서 과장된 걸 수도 있지만. 도장조각들을 세던 엄마 손가락을 보며 원리를 깨우치는 그 순간이 정말 소중했다. 무엇이 곱셈인지, 왜 간편한건지 깨달은 순간, 더 이상 구구단의 72개 숫자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10살때부터 친구따라 동네 수학 공부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엄한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냥 선생님이 좋았다. 워낙 무서운 선생님이었어서, 이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으면 별이라도 딴 것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계속 칭찬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많은 숙제를 내주셔도 엉엉 울면서 하더라도 꼭 끝냈다.
이 선생님 덕분에 수학을 점점 더 잘하게 되었고, 추천을 받아서, 5학년때 '창의력 수학' 학원을 다녔다. 틀에 박힌 교과서 수학이 아닌 다양한 흥미로운 수학문제들을 이 때 많이 접했고, 어느 새 국제고/외고 보다는 과학고등학교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과정도 이때부터 시작했는데, 어렵긴 했지만, 어려워. 하기 싫어. 가 아니라 풀고나면 희열감이 오는, 오 재밌는데? 하는,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수학 선행을 계속했다.
6학년 가을 즈음 부터는 고등수학을 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수학의 정석을 풀고있으면 괜히 나자신이 멋있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열심히 했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는 고등과학까지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과학은 수학보다 훨씬 어려워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학원에 같은 레벨 친구들중에 여자가 나 혼자였다. 다 남자애들이었는데, 나도 그 남자애들 사이에 끼고 인정받고 싶어서, 끝까지 공부했다. 중학교 시절 이렇게 남자애들과 경쟁하고 공부하면서 느낀건, 공부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정말 모르겠어도 이를 악물고 책을 읽고 수업을 듣고 문제를 풀고 질문을 하다보면 어느 샌가 내꺼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평생 내 것으로 남는다.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항상 울고 힘들어하면서도 한 번도 그만 둔 적이 없었다. 아빠는 내가 이공계보다는 법,정치 쪽을 공부하길 바라셨는데, 괜히 아빠 이겨먹으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중학교시절, 너무 재미있었다. 방대한 양의 새로운 지식들을 흡수하는 것도, 집에서 벗어나서 학원에서 친구들이랑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너무 행복했다. 틈만 나면 노래방을 가고, 쇼핑, 카페를 가고 친구들이랑 놀았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니 아무도 나에게 뭐라하지 못 했다. 그 꽉막힌 자유와 행복감이 정말 그립다.
그리고 내 인생 첫 실패는 과학고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거의 평생을 "내가 제일 잘 났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과학고에 떨어지고 나니 그게 아니라는 걸 너무 크게 느꼈다. 과학고에 들어갔다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한편은 과학고에서 떨어진게 감사하기도 하다. 실패를 겪었고, 한참 방황하긴 했지만, 이 실패를 발판 삼아 다시 일어나서 공부를 계속했다.
고등학교때에는 별 특별할 것 없었다. 그냥 남들만큼 공부했고 남들만큼 힘들어했다. 과고의 실패 덕분인지, 나는 내 고등학교 시절, 절대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학에 대한 열정도 딱히 없었고, 그냥 생각없이 공부했다.
대학교를 지원할 때, 성적에 맞춰서 지원하느라, 수학과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전공을 생각하고 지원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들어간게 수학과. 그러다 문득 "내가 수학을 좋아하는게,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다른 걸 못 보고 수학만 생각해서 일까? 아님 정말 다른거 말고 이거를 좋아하는 걸까? "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리, 화학, 무용, 철학, 컴퓨터 등 내가 관심있던 분야 수업들의 교양 혹은 기초과목들을 다 들었다. 그런데 수학만큼 흥미롭지가 않았다. 내가 수학을 공부했던 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결국 "아 나는 그냥 수학만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교수님께 부탁드려서 연구인턴을 시작했고, 석사과정을 했고, 박사과정까지 하고있다.
내 인생에 수학밖에 없구나 깨달은 이후로, 학사졸업, 석사, 박사과정은 그냥 자연스러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중학교를 가는 것처럼. 지금 깨달은 건데, 나 스스로 왜 박사를 해야하지? 하고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더하기를 배운 후에 곱하기를 배우는 게 당연한 것 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내 이름이 써져있는 논문을 (아주) 많이 출판하고싶다."가 현재 내 유일한 욕구인 것 같다. 좋은 교수, 교육자가 되고싶다는 생각은 없다.
그리고 점점 고차원의, 어려운 수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건데, 수학은 아주 배타적이다. 다른 학문은, 학부생이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 새로운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는게 가능한데, 수학은 그렇지 않다. 배경지식이 아주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특출난 학생이라도, 훨씬 오래 공부하고 경험이 많은 교수님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이기는게 불가능하다. 반대로 이 말은, 아무나 나를 못 쫓아 온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무엇을 공부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가 될 것이다. 이 것은 내가 특권층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내가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나는 점점 좁은 특권층에 올라 설 수 있다는 뜻이다. 가족들이 내 연구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게 고독하긴 하겠지만, 그만큼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수학공부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수학자로 태어났는가? 아니다. 부모님 덕분에 인내심 하나는 가지고 커왔고, 내 행복감을 그저 수학을 공부하는 것 속에서 찾은 것 뿐이다. 그리고 언덕을 굴러내려가며 커지는 눈덩이처럼 나도 그저 굴러갈 뿐이다. 학문을 탐구하는 것, 특히 수학은, 중독적이라고 생각한다. 공부하다가 정말 어렵고 모르겠는 정의를 만나거나 문제를 만나면, 당연히 자괴감, 절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그 순간 엄청난 희열감이 온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공부를 계속한다. 유레카! 그 순간을 위해.
결론은, 나는 특별히 수학을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가 없다. 그저 내 행복감을 찾아 계속 움직일 뿐이다. 엄청난 공식을 발견한다거나, 필즈상(수학의 노벨상)을 받고싶다는 욕심같은 것 없다. 주면 감사하겠지만, 그냥 내 수학적 지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싶을 뿐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책을 읽고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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