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포스터 신드롬. 혹은 가면 증후군.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런 증후군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간단히 말하자면 임포스터 신드롬이란 본인의 노력을 믿지 않고 성취를 과소 평가 하는 감정이다. 본인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데, 운이 따라줘서 우연히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련 된 내 얘기를 먼저 하자면,,
나는 좋은 대학교에 다니고, 석사 과정을 여유롭게 끝내고, 미국에 박사과정까지 하고 있는 나를 '운이 좋아서' 라고 표현해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지금 이자리에 있는 이유는..운이 좋아서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에 합격했고, '운이 좋아서' 학부 인턴도 했고, '운이 좋아서' 좋은 지도교수님을 만나 석사과정을 큰 무리 없이 마쳤다. 영어실력도 별로인 내가 '운이 좋아서, 아시안이라서, 여자라서' 미국 대학원에 합격했고, '운이 좋아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운이 좋아서' 공짜로 학회(여행)도 다닌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의 양은 항상 충분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데, 그저 운이 따라줘서 잘 된 것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생각하는게 잘 못된 것이라고 생각해본적도 없다. 다들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사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이게 임포스터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거라고 깨달은 게 4달 전이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 지도교수님으로 관심이 가던 교수님이 주최하는 여름학교에 가게 되었다. (이것도 우리학교에 다른 애들이 지원 안 하고 나 혼자여서 운이 좋아서 가게 된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애들 있었으면 못 갔을 거라고.)
2주동안 이루어진 여름학교의 세번째 날 저녁인가.. 스케쥴 표에 'imposter syndrome discussion'이 배정되어 있었다. 임포스터 신드롬이 뭔지 몰랐던 나는 이게 무슨 수학 용어인줄 알았다. 무식 티내지말자... 그래서 그 날 저녁 직전 구글링을 해봤는데, 위키피디아에 'individual doubts their skills, talents, or accomplishments..' 어쩌고... 라고 써져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discussion에 참가했다. ( 이거 스케쥴에 넣은 주최자들 너무 멋지다.)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교수님들이 한 분 씩 본인들의 일화를 얘기해줬다.
그 중에 한 여자 교수님이 자신이 대학원시절 '운이 좋게' 어떤 학회에서 톡을 진행했고, '운이 좋게' 그 자리에 있던 한 교수님이 자신을 좋게 봐줘서, '운이 좋게' 포닥 자리랑 교수자리를 바로 얻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순간. 누가 망치로 내 머리를 내려친 듯 했다. 그 교수님은 교수직을 얻고 항상 무서웠다고 한다. 자신이 여자라서, 그저 운이 좋아서 뽑힌게 들통날까봐, 누가 너 진짜 멍청하잖아! 하고 알아차릴까봐 늘 걱정이 됐다고 한다. 엄청나게 똑똑하고 항상 뭐든 잘 했을 것 같은 교수님인데, 정말 이룬 것 많고 뛰어난 연구자이신데, 나랑 같은 생각을 한다니. 이런 생각에 이름도 붙어있다니.
서러워졌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내가 저 교수님처럼 좋은 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나이가 들어도, 같은 걱정을 할거라는 생각에 무서워졌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운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내가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이 이후로 이 ''가면 증후군''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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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준비 되있어서였다.
내가 준비 되있지 않았다면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중 고등 시절 물론 놀기도 했지만, 잠 줄여가며 공부 열심히 하며 보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 간 거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3때는 정말 평일에 하루 4시간잤다.
여러번 방황을 하고, 여러 교수님 찾아다니면서 물어보고 인턴자리 찾은 덕에 대학시절부터 좋은 경험 쌓을 수 있던 거다.
대학교다니면서 정신 차린 이후로는 여름 방학에도 매일 같이 학교나가 공부했다. 밤 10시 11시까지 학교독서실에 혼자 남아 공부했다. 학부 연구 인턴 하면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안했으면, 교수님들이 석사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추천서 잘 써주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여기도 못 와있겠지.
다른 애들은 박사과정 1학년때 학회같은 거 관심도 없는데, 나는 더 배우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교수님한테 컨택한 덕에 여름학교에 갈 수 있던 거다. 내가 이리저리 찾아보고 고민하고 공부한 덕에, 내 지도교수님이 날 좋게 봐주고, 날 믿어 주는 거다.
항상 발빠르게 움직이고 열심히 한 덕에 운이 좋았던 거고, 그 덕에 내가 이자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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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는게 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내가 거만해질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나를 의심한다. 아직도 나는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런 감정을 경험한다고 한다.
연구는 To do list 에 체크표시를 할 수 없다. 단순 노동이랑 다르다.
예를 들어 집안일을 생각 해보자. 보통 시간이 어느정도 걸리는지 가늠 할 수 있다.
할 일
- 청소기 돌리기 (20분)
- 옷 세탁, 건조 (1시간)
- 설거지 끝내기(10분)
(집안일도 끝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나면, 옷을 세탁기에 넣고 나면 이렇게 선을 긋기가 쉽다. 정말로 옷 세탁이 제대로 된건지, 어디 방 구석에 먼지 한톨 남아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할 일
- 청소기 돌리기 (20분)
- 옷 세탁, 건조 (1시간)
- 설거지 끝내기(10분)
연구는 이거랑 다르다.
어떤 책의 한 섹션을 공부하기가 오늘 목표라고 해보자. 일단 이게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책에 따라 한 섹션이 내용이 많고 길기도 하고, 짧아보여도 오히려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얼마나 깊이 공부하냐에 따라서 그 안에 새로운 내용이 나오면 또 다른 책을 중간에 펴서 읽기도 하고, 위키피디아를 찾아보고 논문을 찾아보기도 한다. 예전에 배웠던 노트를 찾아보며,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구나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예제 하나를 풀어보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절대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면 내가 생각했던 퇴근 시간 보다 늦어진다. 그러다보면 책 읽기를 멈추고, 저녁을 먹으러, 집안일을 하러, 친구를 만나러 가고, 그렇게 하루를 마치게 된다. 겨우 한 문장이었던 내 할일 리스트에 줄을 그을 수 없다.
그러면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생각한다. "오늘 제대로 끝낸게 하나도 없네. 친구랑 떠들고 먹기만 한 것 같아."
"공부 더해야하는데." 하며 잠을 못 이루고, 이런 날이 반복 되다 보면 지치게 된다.
대부분 대학원생/ 연구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은 고민 아닐까. 연구의 양은 측정 할 수 없다.
지금 내가 이렇다.
내가 '운이 좋아서' 이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좀 줄었는데, 지금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확신 할 수 없다.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시간만 버리고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이 감정을 곧 이겨낼 거라는걸 안다. 계속해서 앞을 보고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이런 고민도 잊게 될 거다, 늘 그래왔듯이.
근데,,,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더 빨리 끝냈을 거라는생각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내가 너무 멍청해서 뭐 하나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해???
이런 감정을 또 겪을 거라는게 무섭다.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게. 평생 이런 감정들이랑 씨름해야하는게 겁난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지내다 보면 다음번엔 내 감정을 좀 더 잘 다스리게 되지 않을까하고 바라게 된다.
난 혼자가 아니다. 충분히 열심히 하는 중이라고, 그냥 꾸준히 계속 하면 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좀 나아지겠지.
난 할 수 있다. 난 열심히 하고 있다.
미래의 지친 내가 이 글 다시 읽고 다시 힘을 내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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